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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기 피격 40년 “추모행사 없다”

      40년 전 오늘(1983년 8월 31일)은 비극의 하루였다.   그날 뉴욕 JFK 공항을 떠난 대한항공 007편은 다음날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 탑승객 전원(269명)이 목숨을 잃었다.   뉴욕 버펄로 지역에서 의사로 활동했던 박민식(당시 32세) 씨는 이날 격추된 비행기에서 ‘41D’ 좌석에 앉아 있었다.    당시 희생자 명단에 따르면 41번 좌석 열에는 박씨의 아내인 애경씨를 비롯한 딸 주령(영어명 세라·4세)양과 아들 주항(그레이엄·2세)군까지 함께 탔다. 박씨의 고국행은 4년 만이었다. 어머니의 생신을 축하하러 아내와 아들딸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 올랐다.   탑승객 임원복씨의 사연도 가슴 아프다. 73년 미국에 이민온 김석형씨의 모친이다. 환갑을 맞아 아들 김씨의 초청으로 미국에 왔다가 귀국길에 변을 당했다.   사업가였던 김씨는 이 사건을 계기로 목회자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피격 1년 뒤인 1984년 롱아일랜드성결교회를 개척했다.   비행기에는 맥도널드 로렌스패튼 하원의원을 비롯한 미국인들도 다수(62명) 탑승 중이었다.     그날의 충격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도서관에 보관 중인 대통령 발표문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레이건 대통령은 1983년 9월 9일 “대한항공 007편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국민적 애도를 표하기 위해 1983년 9월11일을 국가 애도의 날로 지정한다”고 전했다.   민항기에 미사일을 쏜 소련의 행태에 분노가 들끓었다. 시위는 한국은 물론 미국 전역으로도 확산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한인과 미국인 등 500여 명이 당시 소련 영사관 앞에 집결했다. 시애틀 주재 한국 대사관 앞에서 벌어진 시위에는 당시 2살이었던 노수전 양까지 피켓을 들었다.   장승호, 승일 형제도 이 사건으로 부모를 잃었다. 당시 마리오 비아기 하원의원은 이들 형제를 꼭 안아줬다. 그리고 이들 형제가 미국에서 학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지원 방안을 의회에 제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렇게 수많은 이들이 한순간에 슬픔을 떠안게 됐다. 당시 대한항공 임원들은 유족들을 방문해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보상금 지원도 약속했다. 그렇다고 가슴에 사무친 슬픔까지 돈으로 지워낼 순 없었다.   유가족들이 간절히 원하는 건 오직 진실이다. 대한항공 007편이 항로를 이탈한 이유는 불분명하다.    이후 유엔 산하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조사 결과 등을 종합해보면 당시 천병인 기장(당시 45세)은 관성항법장치(INS)가 아닌 나침반에 의존해 비행기를 몰았지만 정확한 원인은 여전히 미스터리다.   나중에 러시아로부터 전달받은 블랙박스 역시 알맹이가 없었다. 다른 한 개는 조작 흔적이 있는 복사품이었다. 희생자의 유품 등도 제대로 돌려받지 못했다.   그렇게 40년이 흘렀다. 유가족들은 여전히 웹사이트(rescue007.org) 등을 통해 진실을 찾고 있다.    미국도, 당시 소련도 진상 규명에는 미흡했다. 유가족을 제외하고는 그날을 기억하는 이조차 없다. 대한항공조차 마찬가지다. 대한항공 측은 30일 본지에 “피격 40주년과 관련한 추모 행사는 계획된 게 없다”고 밝혔다.   비극은 묻혔지만, 유가족은 아무도 모르는 진실을 여전히 찾고 있다. 장열 기자ㆍjang.yeol@koreadaily.com피격 대한항공 임원들 대한항공 007편 대통령 발표문

2023-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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